여긴 너무 서울. 로설 읽을 땐 의식이 현실로부터 평화롭게 분리되는데 이 작품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음. 특히 프로종로러, 전현직 여의-마포러, 가끔고궁마실러, 서울출사러들은 실명으로 거론되는 상호나 대개 알 법한 건물들, 익숙한 nn년차 아파트상가 앞에서 순식간에 판타지가 주는 편안한 거리감을 상실하게 됨. 이 거리에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공진솔과 이건이 왔다갔다 함. 주인공들 괴로워할 때 독자도 여유없이 동병상련하라는 거 같음.
남주는 요망함.
이성에게 인상을 남기는 효과적인 방법은 우선 타이밍을 빼앗는 건가 봄.
이건은 진솔의 평범한 자기소개를 빼앗고,
엄중한 쓰레기분리수거의 고독을 빼앗고
민방위 대피훈련의 소중한 멍때리기를 빼앗고,
연애경험 상호교환의 윤리를 배반함.
훅 들어오는 타이밍은 더 나쁨.
"내가 갔으면 좋겠어요?"
"공진솔! 어디 가요?"
"아닌 것 같은데? 나 쳐다봐요."
"이 약, 혼자 먹으려고?"
"당신, 파울이야."
아, 앓느니 죽으라는 거임.
여주가 냅다 고백해 버린 것도 앓을 수만은 없으니 목 내놓은 거 아니겠음. 아무튼 이건 이놈은 너무 악랄한 타이밍탈취범임. 거의 이 기술 하나로 공진솔의 마음을 홀라당 벗겨먹음. 스몰토크 장인, 유혹의 가성비로 짱 먹을 놈. 근데 이 뻔한 기술에 나도 다 털림.
여주는 직진함.
연애소설 여주가 세상 연애의 청자고 목격자임.
진솔의 눈과 귀에 이건의 숨겨도 드러나는 짝사랑이,
애리와 선우의 해탈할 뻔한 10년 연애가,
좌충우돌 질러서 득하는 한가람 연애연대기가,
대성통곡을 동반한 희연의 국지성호우 같은 실연이,
이필관 할아버지의 기한이 한참 지나 후일담까지 멋쩍어져버린 연정이 다 모여듬. 엄마 재가시켜주는 것도 진솔이가 직접 함. 마치 줄쳐진 노트 같음. 펼쳐져 있으면 각자 알아서 기록하는.
화자로서 공진솔의 목소리는 이건의 헛소리 이후에 인상적임. 남주의 시원찮은 항변에 한 마디도 물러서지 않음. 달변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치밀한가 하면 부족함. 다만, 타협 없이 솔직하고 양보 없이 끝을 향함. 누가 설득하고 설득되고의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헤어질 것인가만 남음. 보고 싶지 않으면 피하고, 가슴 아프면 울면서 이 시간을 지나감. 방송작가로서 자신의 일을 되돌아보고 주거를 바꾸고 새 삶을 살 준비를 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감. 나중에 남양주 집에서 이건을 붙잡는 것도 진솔이고, 초라해질까봐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진솔임.
아니 뭐 이런 타박타박 용감한 직진이 다 있나. 남주를 포함한 자기 삶으로 직진.
저 줄쳐진 노트는 행간이 본문이고 그 본문의 저자야말로 온전히 진솔임.
이 연애담은 기본에 집중함.
연애소설에서 철수와 영희의 사랑이 왜 이루어지기 어려운지 장애물 설정이 알파고 그 장애물 제거 과정이 오메가라면, 최고난도 장애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철수(영희)가 영희(철수)를 그냥 안 사랑한다는 거 자체가 아닐까. 소설 끝나가는데 (아직) 안 사랑한다는데 어떡함. 이보다 더 큰 안타까움이 어딨음. 애리는 애초에 장애물도 뭣도 아님. 이건이 문제임. 물론 이건이 진솔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님. 투명하지 않고 충분하지 않고 맞춤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랑하긴 함. 젠장.
고백한 사람은 을이고, 고백의 유효기간은 고백 받은 사람이 정하는 걸까. 진솔의 고백은 처음부터 시한부였음. 사랑의 감정은 언제나 가슴 떨리지만 진솔은 그런 마음이 시시한 연애로 종결될 수 있다는 걸, 진심이 얼마나 나약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임. 상대방의 불안한 진심에 모든 걸 걸고 싶지 않다는 진솔과 두 달밖에 못 기다리는 마음이 사랑 맞냐고 묻는 이건의 관계에선 갑을이 바뀌어 보임.
사랑이 모호해서 사랑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면 그건 마음에 물어야 할까, 몸에 물어야 할까. 이건이 공진솔을 사랑하는구나 느꼈던 최초 지점은 울면서 찾아온 애리를 보내고 진솔에게 전화했을 때. 이건 짝사랑의 역사에 비추어, 직장까지 찾아온 애리를 뒤로 하고 친구(진솔) 만나러 갈 거 같지 않았음. 어떤 핑계로든 선약을 취소하지. 3시간이나 늦었지만 어쨌든 만나러 간 걸 보고 건이가 사랑하는 사람은 진솔이겠구나 했음. 그러니까 일기장이니 뭐니 시답잖은 말 집어치우라고ㅅㅂ. 사랑의 증거는 마음이 아니라 몸,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찾아야 함. 세상엔 증거투성인데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찾느라 다들 고생함.
이별의 시간과 애도의 시간은 다른 거 아닐까. 이건의 6년-3년 전이 짝사랑과 이별의 시간이었다면 최근 3년은 애도의 시간, 이건은 지금 3년 탈상 중. 그는 치명적인 실수는 해도 거짓말쟁이는 아님. 오히려 번거로울 정도로 솔직함. 사랑이 뭔지 이제 잘 모르겠다거나 힘든 감정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은 애도의 기간에나 나올 수 있는 말임. 이별기에 시작된 연애는 대개 실패하지만 애도기에 시작한 연애는 대개 성공함. 애도의 기간이야말로 성숙의 시간이라 그럼.
연애가 이기고 지는 게임은 아니지만, 최소한 연애소설에서는 항상 더 사랑하는 쪽이 이기는 거 같음. 사랑이 이루어지든 아니든 연애소설의 기록자는 더 사랑하는 쪽이고, 그래서 이 작품은 공진솔의 얘기라는 생각. 소나기는 소년의 기록, 동백꽂의 진주인공은 점순이임. 가끔 로설에서 짝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나는 글을 보고 싶음. 언해피인 짝사랑의 기록은 얼마나 흡족할까. 그런 의미에서 연애소설은 판타지 맞음.
가끔은 이렇게 뭔가 미진한 두 번째 사랑이 미숙한 첫사랑의 기억을 밀어내도 괜찮지 않나. 어떤 경우라도 결국 모든 연애는 세상유일무이한 사랑 아닌가하면서 책 덮음.
- 어느 시점부터 오픈 엔딩이길 바랐지만, 기대와 별개로 본 엔딩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함. 세월흐름은 선우 캐릭터에서만 느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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